[book] 이너게임 테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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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게임 테니스

어떤 일을 할때,

우리의 자아는 ‘판단하는 자아’와 ‘수행하는 자아’로 나뉘어진다.

테니스를 친다고 하면,

“이런 멍청한놈, 좀 더 제대로 했어야지!”, “좋아, 이번엔 아주 잘쳤어.”, “이번엔 더 잘쳐야돼!”

등의 판단하는 자아를 ‘자아1’ 이라고 하면,

무의식적으로 동작을 기억하고 팔을 휘둘러 스윙을하는 녀석을 ‘자아2’ 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자연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한다. (자아2)

우리는 단지 이를 방해하지 않고 일깨워주기만 하면 된다.

이를 일깨우기 위해서는 기존의 학습방식인 ‘고치는’ 버릇을 버려야한다. (자아1의 개입)

즉, 판정하는 태도를 버리고 실제 일어나는 일을 그저 관찰하면 된다.

예를들어 포핸드가 네트에 걸리면 “왜이렇게 안되지?”, “망했네” 라고 판정하거나,

포핸드가 잘 넘어가면 “아주 좋았어”, “잘 넘어갔네” 라고 판정하지 말아야한다.

“손목의 각도를 세우니 네트에 걸렸다”, “각도를 좁히니 네트를 넉넉하게 넘어갔다” 등의 ‘사실’만을 관찰하면 된다.


책을 보기위해 책상으로 걸어가고, 전등을 켜고, 하얀 종이위의 검은 글씨들을 조합해 단어를 만들어서 의미를 파악한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의식적으로 수행하지 않는다. (자아2가 자연스레 수행함)

그리고 의식적으로 수행하려고하면 오히려 되지 않는다. (자아1이 개입하면 오히려 잘 되지 않는다)

“숨을 쉰다”는 사실을 의식하면 숨쉬는게 상당히 귀찮아지는 것 처럼,

그냥 ‘자아2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중요하다.


몸을 움직일때, 언제, 어떤 근육들이, 얼마나 많이 사용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자아1은 이러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마치 통제 가능하다는 듯이 의도적으로 간섭하려들고,

이러한 과정에서 오히려 불필요한 근육까지 사용하게된다.

자아1은 샷을 강하게 치기위해 많은 근육을 사용해야한다고 생각하기때문에,

실제 스윙을 할 때 어깨, 손목, 심지어 얼굴 근육까지 사용하게되어 정작 스윙에는 제대로 힘이 실리지 못한다.


자아2가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라면, 자아1은 부모의 마음이 되어야한다.

아기가 걸음마를 배울때 이래라저래라 간섭한다거나, 넘어졌을때 그것에대해 ‘평가’하는 부모는 없을것이다.

그저 아기가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때 까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그 상황을 ‘지켜볼’ 뿐이다.

어머니와 아기가 다른 존재이듯, 나와 나의 백핸드는 다른 존재임을 인지해야한다.

내가 백핸드를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놔둘 때, 비로소 백핸드는 걸음마를 배우고 제 역할을 해낼것이다.


자아2와 소통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필미지(feelmage)이다.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머릿속에 최대한 구체적으로 이미지화 해서 전달한 후에,

그저 그것이 제대로 될 때까지 반복해서 몸을 움직이면 된다.

볼이 네트 위를 얼마나 높이 지나서, 코트의 어느쪽에 떨어져야하는지에대한 이미지를 상상하고,

몸을 그냥 흐르는대로 둔다면 스트록이 훨씬 개선될 것이다.

마치 ‘훌륭한 플레이어 역할을 받은 배우’처럼 행동하는 것 또한 자아2에게 이미지를 전달하는 효율적인 방법이다.


자아2가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을 요약하자면,

  1. 판정하는 태도 버리기
  2. 이미지 창조하기
  3. 일이 일어나도록 놔두기


완벽한 샷을 쳐내고도 투덜거리는 이유는,

자아2의 직관적인 지식을 믿지 않고,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등 자아1의 기대치와 비교했을때의 격차에서 나오는것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교습이 어느정도 필요하긴 하지만, 이를 토대로 훈련하되 직관을 믿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옳은’자세란 없고, ‘일반적으로 옳다고 알려진’ 자세가 있을 뿐이다.

예컨대, “백핸드를 칠 때 손목을 고정하라” 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완전 느슨한 상태에서도, 완전 힘을준 상태에서도 공을 쳐낼수는 있다.

다만 “손목을 고정하는 정도”를 내 감각으로 익혀야 할 뿐이다.


즉, 보고, 배우고, 가르침을 받되, 그것을 익히는 과정은 온전히 자아2에게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 어떠한 고급 지식보다 더 위대한 자산은 바로 본인이 가진 자아2이다.

스스로 연습하면서도, 남의 일인 것 처럼 그저 흥미로운듯이 관찰하고, 분석하라.

이너게임의 핵심 학습법은, 어린아이의 학습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노력하지 말라’는 것은, 유약해지라는 의미가 아니다.

과도하게 신경쓰지 말고, 자아2를 믿으라는 의미이다.

‘서브가 서브하도록’ 놔두고, ‘백핸드가 백핸드하도록’ 놔두면 되는 것이다.

어떤 행동을 ‘올바르게’ 하려고 하지 말고,

원하는 결과의 이미지를 그린 후, 그 이미지에 가까워 질 때까지 반복 수행하며 관찰하라.

새로운 변화는 실제 결과가 주어진 이미지와 일치하지 않을 때에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테니스 코트에서 자유롭게 플레이하도록 자신을 놔둔다면,

인체라는 아름다운 메커니즘 안에서 더욱 큰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내가 더욱 신뢰할수록, 내 몸은 더 큰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패배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패배가 아닌 자아2의 패배라는 생각으로, 자아2가 편하게 뛰어놀게 놔두자.

이 때, ‘뛰어놀도록 놔두자’ 라는 생각 또한 자아1이 개입한다는 함정을 주의하자.

즉, 이완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이완하려 노력하기’라는 괴상한 현상이 생겨 자아2가 맘대로 날뛸 수 없다.

자아1이 단번에 통제력을 포기하는것은 분가능하다.

하지만 이완된 집중이라는 기술을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자아1은 반드시 올바른 자리를 찾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아1의 입을 다물게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그 답은 바로 ‘집중’ 이다.

집중이란, 이성이 다른짓을 못하도록 현재, 지금, 이 순간에 붙잡아두는 것이다.

자아2에게 집중하여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하고 명령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날아오는 공의 솔기에 집중을 하다보면, 자아1은 자아2를 방해하지 않고 솔기에만 집중하게된다.

어머니가 설겆이에 집중하는 동안 아기가 걸음마를 연습하는 것 처럼, 자아2는 간섭없이 본인의 할 일을 하게된다.

즉, 자아1(이성)이 뭔가 놀잇감을 찾게 하라.

솔기에 집중한다던지, 바운스-히트를 소리내어 말한다던지, 공의 소리에 집중하는 등의 방법이 있다.

내 몸이 ‘감각’에대해 많이 알수록, 기술의 발전속도로 엄청나게 빨라질 것이다.


이성이 미래나 과거에 주의를 집중하는 순간, 현재에 쏟아부을 에너지는 그만큼 희석된다.

현재를 제대로 볼 수 없다면, 볼이 더 빠르고 작아보리며, 심지어 코트의 크기가 줄어든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반대로 현재에 집중할수록 시간의 흐름이 느려져 볼을 보고 보내기위한 인지력이 생긴다.

포인트와 포인트 사이에 현재에 대한 집중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호흡에 집중하라.


불안이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며,

이는 이성(자아1)이 어떤 미래가 올지 상상할 때에만 발생하는 것이다.

경기의 승패에대해 걱정하는 순간, 이성을 호흡에 집중시켜보라.

그러면 이전 포인트의 플레이보다 더욱 집중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제대로 된다면 매우 치열한 테니스 경기 도중에도 조화, 균형, 안정,

심지어 ‘평화’나 ‘만족’의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자아2는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해왔으며,

자아2를 만끽하고 감사하는 것이야말로 주의를 집중했을때 받을 수 있는 선물이다.

자아가 어떤일을 두고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여긴다면,

그 일에 대해 즐거움을 느끼거나 집중할 수 없다.


“플레이 할 가치가 있는 게임”을 찾아라.

이너게임에 승리하면, 패배하더라도 승리한것보다 훨씬 큰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승리하고자 노력하는대신 아름답고 훌륭하게 플레이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상대에 비해 얼마나 잘하는지에대해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훌륭한 플레이 자체에만 몰두하게된다.


그런데,

자아의 참견이 없고, 두려움과 좌절감이 사라진 상태에서 과연 “이기고자 하는 의지”가 존재할까?

“이긴다”라는 것은 반드시 “내가 너보다 잘하지”와 같은 형태는 아니다.

서퍼들은 ‘가장 큰 파도’가 오기를 기다린다.

단지 ‘흐름을 타기’만을 즐긴다면, 왜 굳이 가장 큰 파도를 기다릴까?

이는 ‘큰 파도에 도전하는 일’을 가치있게 여기기 때문이다.

승리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장애물을 극복하는 일’일뿐, 달성한 목표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지는 않는다.


테니스에서 상대방이란, ‘나의 최대 한계를 경험하기 위해 필요한 장애물’을 제공해주는 사람이다.

상대방이 적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만, 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와 경쟁해야만, 나와 협력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건, 나 또한 상대에게 최고의 장애물을 제공해주어야한다.

내가 다른 생각을하며 실력을 제대로 내지 못한다면, 상대에대한 큰 실례이다.

백핸드가 약한 상대에게 백핸드를 계속 유도하는 것은 오히려 친절함이다.


이러한 경쟁에 들어서게 되면,

상대가 더블폴트를 범하길 바라는대신 서브가 제대로 들어오기를 바라게된다.

매 스트록에서 상대의 공이 제대로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게임에 임한다면 더욱 적절하게 움직일 수 있다.

경기 후 승패에 상관없이 훌륭하게 싸워줬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악수하게된다.

패배나 승리를 목전에두고 팽팽하게 긴장하는 이유는 경쟁에대한 개념이 잘못되었기 떄문이다.


단지, 어떤 상황이든간에 매 포인트마다 최선을다해 상대방이 내어준 장애물을 뛰어넘고,

나 또한 상대방에게 최고의 장애물을 선사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것이 바로 여태까지 이야했던 ‘자아2를 플레이하게 놔두는 것’이다.


“승부에 대한 결과” 란 내가 절대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므로, 이것에 집착하면 “지나치게 노력” 하게된다.

다만 “승리하기위해 기울이는 노력”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므로, 이 부분에 포커싱하면 된다.

“나는 지금의 포인트를 따내기 위해 최선을 노력을 다하고있다”는 사실만 인지하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불안에 쏟으며 낭비한 에너지르 “포인트를 따내기위한 노력”에 쏟아부을 수 있다.

물론, 그 결과로 실제 포인트를 따냈는지 아닌지는 중요한게 아니며, 통제할수도 없는 부분이다.


‘이곳’에서 ‘지금’ 이루어지는 현상에 ‘집중’ 하고,

자기 판정을 ‘흘려보내며’, 매 순간 기울이는 노력에 따라 이너게임의 승패는 갈린다.

그리고 이 게임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테니스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집중하는 법을 배우는 대신,

집중하는 법을 익히기 위해 테니스를 연습하게 된다면,

이는 외면의 게임에서 내면의 게임으로 핵심적인 가치가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전환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불안감과 좌절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외면의 목표는 그 종류와 수가 엄청나게 많고, 또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많은 기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면의 장애물의 진원지는 단 한 곳(자아1)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이를 정복하기 전까지는 내가 어디서 무엇을하든 두려움과 의심, 망상을 만들어낸다.


자아1에 대응하고 박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자아2를 믿고 독려하는것이 균형을 이루는데 더 효과적이다.

다만, 자아1 또한 적절히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공의 솔기를 보는것처럼…)


삶이 선물이라면, 자아1이 가하는 스트레는 그 삶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훔쳐가는 도둑이다.

지나친 의식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있다면, 코트 안에서든 밖에서든 많은 것을 잃고있는 것이다.

스트레스로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결코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것을 흘려보내더라도 크게 상관없다는 사실”을 깨우쳐가는 것이다.

(이를 좀 더 확장한다면, 타인의 눈치를 보며 살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고, 주체적인 삶을 찾아가는 것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자아2가 제시하는 내면의 요구와,

자아1에 의해 ‘내면화된’ 요구를 구분해야한다.

어떤 요구가 스물스물할때, 그것이 정말로 ‘나의 내면’에서 나온 것인가?

아마 어디선가 주워들었거나, 주입받았을 확률이 높다.

이러한 것들은 상당히 그럴듯하고, 미묘하지만 끊임없이 재촉하는 자신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못하게한다.


‘긍정적 사고’와 ‘이너게임’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긍정적 사고가 어떤 상황을 ‘좋게’생각하는 것인데 반해,

이너 게임은 어떤 상황이든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내 몸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믿는’ 것이다.

“이 순간에 집중하라”

이 말은 과거의 실수나 영광, 미래에대한 두려움이나 희망에 조금이라도 현재의 주의를 빼앗기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통제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여라.”

이를 확장해, 삶과 죽음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사람은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자아2는 외부로부터 받는 칭찬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 잘 알고있다.

인류는 지난 몇세기동안 외면적 도전을 극복하는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내면적 도전에 집중해야한다는 소홀히 하고있다.

이너게임이란 자기주의와 다르다.

자신을 위해 공헌하는 법을 배우는동안 저절로 모든 사람을 위해 공헌하게되는 자기발견의 과정이다.


“진정한 게임이란 마음이 동하는 게임, 내가 즐거운 게임, 그리고 내가 이길 게임이다.”




코딩장이

코딩장이

-장이: [접사] ‘그것과 관련된 기술을 가진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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