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 한 판] 스물하나, 디지털아트
- 3 mins서론
앞서 기록한
에 이어지는 두 번째 기록이다.
스물하나, 디지털아트
앞선 글에서 디자인과에 입학하기까지의 과정을 되돌아봤었다.
내가 이과에서 3년동안 신소재공학과를 목표로 공부했다가 디자인과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간지나보여서’ 였다.
디자인을 한다고 말하면 뭔가 세련되고 지적일 것 같으면서 유쾌한 이미지까지 덤으로 소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초에 신소재공학과도 ‘학과 이름이 간지나서’ 선택한거였다)
화룡정점으로,
나중에는 뜬금없이 법학과를 목표로 재수를 준비하다가 추합 전화 한통에 공부하던 ‘법과 사회’ 책을 덮어버렸다는 말도 했었다.
정말 창피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전부 팩트다.
어쨌든 뭐 기적적으로 입학은 했다만,
과연 그렇게 입학한 디자인과에서 적응을 잘 할 수 있었을까?
그림은 커녕 그 흔한 낙서도 잘 하지 않던 내가,
그렇다고해서 미술쪽으로 남다른 재능이나 특출난 센스가 있지도 않았던 내가,
수 년간 입시미술준비로 실력을 갈고닦은 실기생들을 당연히 따라잡을순 없었다.
물론 나에게 정말 뚜렷한 열정과 목표가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수도 있지만,
단순히 디자인과의 껍데기만 보고 홀리듯 입학한 이과생은 한학기만에 지쳐버렸다.
더 한심한건, 그 상황에서도 스스로 한심하다고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2학기때는 아예 디자인과 수업 대부분을 빼버리고 교양과목 위주로 들었다.
주변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전과를 하겠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물론, 전과하고 싶은 과는 없었다.
그냥 디자인이 하기 싫었고,
학점의 대부분이 교양과목과 온라인강의인 것에 대한 해명을 스스로 해야한다고 생각했나보다.
교양수업에서 알게된 타학과 친구들은 내 시간표만 보고서는 나의 학과를 절대 맞출 수 없었다.
그렇게 1학년이 끝나고 동기들이 한두명씩 입대를 준비할 시기에,
그리고 2학년으로 넘어가면서 전공을 선택해야할 시기에,
뜬금없이 학과에 새로운 전공이 생겼다.
시각디자인/산업디자인 모두 관심이 없던 나에게 한줄기 빛 같은,
이름하여 ‘디지털아트’ 전공이었다.
딱히 전과할 곳도 결정하지 못했던 나는 더 생각할것도 없이 디지털아트 전공을 선택했다.
이쯤되면 내가 과연 생각이란걸 시작한건 몇 살때부터일까 하는 의문이 증폭된다.
확실한건, 스물 한살때까지는 절대 아니었던듯.
그래도 다행히 전공수업들이 나름 어느정도 적성에 맞았다.
특히 회로도를 구성하거나 코딩하는등, 논리적인 사고를 요하는 부분이 꽤나 재밌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생각보다 내가 만들고싶은걸 만들기위해서는 돈이 꽤나 필요했다.
센서, LED, 트랜지스터, 빵판, 밧데리, 프레임 주문제작등,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큰 돈은 아니지만,
당시 용돈을 받고다니던 학생입장에서는 부담되는 정도였다.
그리고 아마 교수님도 그것을 어느정도 알고 계셨기때문에,
처음부터 커다란것을 하기보다는 작지만 좋은것도 많다는 것을 꽤 자주 이야기 해주셨던 것 같다.
사실 아이디어들이 통과됐어도 당시의 지식과 열정 정도로 완성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기술적인 기반을 충분히 다지지 않고 항상 아이디어만 주구장창 짜냈던 것 같다.
좋게 생각하면 기술에 얽매이지 않아 더 창의적인 생각들을 할 수 있었지만,
사실 창의성을 떠나 현실적으로 구현이 어려운 터무니없는 아이디어들이 꽤 많았다.
어차피 구현할 수 없는 아이디어는 껍데기일 뿐인데 말이다.
당시의 나는 만들고싶은것을 못만들게 하는 교수님이 많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 그릇의 크기를 정확히 측정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전공 자체가 크게 싫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흥미를 느끼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디지털아트라는 전공이 사실 디자인보다는 순수예술에 가까웠기때문에, 취업길도 막막하게 느껴졌었다.
노력은 쥐뿔 한 적도 없으면서 취업길을 막막해하다니,
나는 어디까지 한심하고, 어디까지 이기적인 사람인걸까,
아마 이때쯤부터 슬슬 생각이란걸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어쨌든 2학년이 끝나갈 무렵 취업을 고민하다보니,
내가 공부하는 것들을 좀 더 실용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곳에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로쪽을 좀 더 깊이 공부해서 전기전자쪽으로 가볼까?”
하지만 회로실습을 하다가 노트북 메인보드를 터트려버린 기억이 떠올라서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
내 20대를 대변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는 아마 ‘포기’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컴퓨터 공학이었다.
마침 IT쪽이 많이 뜨고있기도 하고, 나름 적성이 맞기도 하고,
덤으로 대학원을 졸업하면 병특으로 대체복무까지 가능하다고 하니 더 고민하지 않았다.
까놓고 말해서, 대체복무가 가능하다는 부분이 제일 컸다.
어차피 당시의 나는 뚜렷한 목표도 없었고,
그냥 대충 적성에만 맞으면 일단 그 길을 선택해서 취업할 생각이었다.
그런 조건이 다 들어맞는데, 거기다가 병역특례까지 가능하다고?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한심하기 짝이없지만,
나는 그렇게 다시 진로를 우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