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 한 판] 스물셋, 학위라는껍데기1 (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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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앞서 기록한

“스물, 이과, 디자인”

“스물하나, 디지털아트”

에 이어지는 세 번째 기록이다.


스물셋, 학위라는껍데기1 (학부)


사실 내가 컴퓨터공학쪽으로 본격적으로 진로를 변경한것은 막 4학년이 되던 무렵이었다.

참고로 진로을 바꿨다는게 전과를 했다는 뜻은 아니다.

4학년을 다 마치고 복수전공을 하거나,

대학원으로 바로 진학하는 길 중에 하나를 고민했다.


일단 진로는 돌렸는데, 역시나 또 문제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하지만, 컴퓨터공학 내에서도 무수히 많은 세부 전공이 있었고,

나는 거기서 또 다시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아니, 솔직히 갈팡질팡 정도가 아니라 멘탈이 완전 개박살났다.

전공 수업때 내가 ‘코딩을 했었다’ 라고 착각했던 것들은,

사실 그냥 라이브러리 몇개를 가져다 코드를 바꿔쓴게 전부였던 것이다.


부랴부랴 전공서적을 수십만원어치 구매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말이 공부지,

무슨 그냥 공무원 시험보듯 관련 용어들을 달달 외우고,

책에 나온 예제들을 아무 생각없이 따라치며 문법을 머리에 쑤셔넣었다.

이때 공부했던 내용들은 사실 지금 대부분 기억이 나지 않는다.

3학년때 컴퓨터공학 기초 교양을 한 번 들은적이 있었는데,

그 때 성적이 꽤 좋게 나왔었기때문에 나는 완전히 잘못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컴퓨터공학을 말그대로 정말 우습게 생각했고,

설상가상으로 마지막학기는 디지털아트 전공의 졸업작품 전시회가 있던 학기였다.

졸업작품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컴퓨터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매주 진행상황 컨펌이 있을 때마다 교수님께 수없이 많은 욕을 먹었고,

특히나 너무 실망스럽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항상 가볍게 판단하고, 가볍게 행동하고, 그 행동에 책임지는 법을 몰랐기에,

누군가에게 실망스럽다는 말을듣는게 이렇게도 마음아픈일인줄 몰랐다.


그 시기부터 나는,

스튜디오에서 매일 밤샘작업하며 열심히 졸업작품을 준비하던 동기들 얼굴도,

디지털아트 전공을 하고싶다며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던 후배의 얼굴도,

컴퓨터공학쪽으로 많은 조언을 주던 동아리 선배의 얼굴도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23년간 대충 결정하고 대충 건드려보다가 대충 포기했으며,

그럼에도 나아지지 않고 악순환을 끊임없이 반복했던 모든 순간들을 한꺼번에 벌받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그 시기에는 항상 죄지은 사람처럼 야구모자에 후드까지 뒤집어쓰고다녀서 사람들이 잘 못알아보기도 했다.


정신없던 2012년이 눈 깜짝할새 지나고, 난 졸업했다.

졸업작품은 결국 전시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F는 면했다.

우여곡절끝에 겨우 겨우 학고정도만 면한 초라한 점수로,

그 점수만큼이나 초라했던 내 부끄러운 대학생활을 마무리했다.

졸업식도 가지 않았다.

스스로 이런말 하기 쪽팔리지만,

당시 페이스북에 올라온 동기들의 환한 웃음과,

타이밍을 맞춰 몇 번씩 시도해 겨우 찍었을 공중으로 던져진 학사모 사진들을보며,

난 꽤 오랜시간 울었던 것 같다.


복수전공과 대학원 사이에서는 선택을 할 기회도 없었다.

복수전공을 신청하는 시기를 놓쳐버리고 바로 대학원으로 가게되었다.


대학원에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여기서 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

컴퓨터에대한 지식도 거의 전무하다시피하고,

공부를 시작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대학원에 갈 수 있지?


사실 대학원에 입학하는 것 자체는 정말 별거 아니다.

아, 물론 여기서 말하는건 경쟁이 빡세지 않은 ‘그저 그런’ 연구실을 의미한다.

그냥 진학하기를 원하는 대학원 연구실 교수님을 찾아뵈어 말을 잘 하고,

어느정도의 열정을 보여주면 된다.

그래서 말만 잘 맞춰놓으면, 그 이후의 입학 절차는 그냥 형식적인 것들이다.


물론 흔히들 말하는 ‘설포카’ 급 연구실은 따로 시험을 봐야하고, 기준도 꽤 엄격하다.

그렇지 않더라도 교수님이 해당 분야의 저명인사거나, 돈이되는 프로젝트를 한다던지,

혹은 누구나 하고싶어하는 좋은 연구를하는 연구실은 경쟁이 빡세다.

본인이 학부때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잘 정리해서 포트폴리오로 제출해야하고,

따로 필기시험과 심층 면접까지 보는 곳도 있다.

그리고 입학전에 미리 한학기정도 연구실 생활을 경험하도록 하는곳도 많다.


내가 몸담았던 연구실을 폄훼할 생각은 없지만,

사실 그렇게 입학이 어려운 연구실은 아니었다.

말 잘듣고, 심부름 잘할 것 같고, 성격이 원만한 것 같으면 웬만해선 받아줬던 것 같다.

학부를 졸업하는 과정에서 학위라는 껍데기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뼈저리게 느꼈음에도,

또다른 무의미한 껍데기를 뒤집어쓰기위한 고된 대학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코딩장이

코딩장이

-장이: [접사] ‘그것과 관련된 기술을 가진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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